교실 이야기

식사 향응과 맞바꾼 보직

Duny 2015. 4. 10. 01:05

 육성회, 운영위원회, 학부모회, 체육진흥회, 어머니회, 녹색 교통대......

 참으로 많은 학부모 모임들이 교사와 아이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듯 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 석자보다 '×××회장 아들'로, 혹은 '×××회장 딸'로 쉽게 불려졌다.

  내가 담임한 학급에도소위  '×××회장의 딸' ○○○가 있었다.

 새 학교로 부임한 첫날 2교시 수업이 막 끝날 때 쯤으로 기억된다. 교감선생님이 급히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새 부임지로 전입을 한 터라, 준비해야 할 발령 서류에 뭔가 잘못되었지 싶어 별관 4층에 있던 교실에서 반대편 1층에 있었던 교무실까지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숨까지 헐떡였다. 교무실 출입문을 열고 막 들어서려는 순간,

  ‘, 5학년 11반 선생! 와서 인사드려요. 우리 학교 체육진흥회 회장님이셔.’

  순간 뒷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어머 그러시군요? 학교체육진흥회장님이면........ 

  나는 거들먹거리는 몸태가 호의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손님을 향해 정확하고 느린 어조로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담듯 한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담임교사가 직접 내려와서 인사를 드려야하는 거군요?

  결코 그렇게 들렸을 리 없었을 테지만 말이 끝날 무렵에는 내 말과 태도가 어느 정도 정중하고 친숙하게 전달되어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말 꼬리를 들었다. 입 꼬리도 간신히 올려 옅은 미소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교감선생님과 눈 맞춤은 없었다.

  갑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아예 없었다 해도 부임 첫 날과 앞으로 4년간의 짧지않을 직장생활에 대한 부담감은 분명 있었던 것같다. 그리고 손님 앞에서 집 안 식구끼리 얼굴 붉히는 모습으로 누워서 침뱉기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땐 그랬다

 

  한 학급에 7~8명에서 많게는 10여명 이상의 어머니나 아버님들이 ×××회원의 이름으로 아이들 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리셨고 학교 일을 돕닌 댓가로 아이들은 자랑스럽게도 자신의 이름보다 ×××회장님 아들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일년에 몇차례 적어도 학년초와 학년말, 이렇게 두 번은 공식적(?)인 학부모와 교사들이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다. 물론 학부모들이 이 회식비용을 부담하였다. 다시 말하지면 2만원을  상당의 담임교사 식사비용은 학부모 7~8명이 이천여원씩을 나누어 분담하고 자리에 참석하는 담임교사는 학부모님들이 족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간까지  봉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멋모르고 참석했던 두어 차례의 회식 자리에서 난 늘 좌불안석, 불편했던 기억뿐이었다. 집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하지 않아 미뤄질 가사 일도 생각도 부담스러웠다.

  더욱이 새 학교로 부임한 첫해의 경우엔 학부모들의 텃새에 손수 가르침도 받아들여야 했다. 새로운 학교 환경이 낯설고 생소했던 나는 학부모님들의 일종의 텃새 속에 어서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던 예의상의 헛웃음으로 그 자리를 지켰던 기억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주선하는 쪽이 거의 학교장 쪽이라는데 더 문제가 있었다. ,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회식이 있다는 전달사항이 내려지면 그날 회식비용의 출처를 캐묻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향응이라는 말조차 생소해진 학부모에 의해 제공되는 향응, 학부모와의 회식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원칙을 세워놓게 되었다.

이런 나의 원칙은 학년부장의 보직을 받으며 문제가 되었다. 학년 부장인 내가 회식에 참석하지 그렇지 않아도 달갑지 않은 회식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학년 선생님들에게는 절호의 핑계거리가 되었다. 우리 학년 선생님들 대부분이 회식자리에 불참하자, 담임교사와 담소를 기대하며 그 자리에 나왔던 학부모들이 우리 선생님은 ~’을 찾았고 담임교사의 빈 자리 옆에서 기대감을 채우지 못한 불편한 심기를 학교장이나 교감에게 토로했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음 날 회식 자리에 나가지 않았던 우리는 교장실로 불려갔고, 학부모들의 불편한 심기는 화살이 되어 나의 자질에 꽂혔다. 이런 까닭에 불거진 자질논란에서 나는 부장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교사가 되었고, 그렇다고 난 태도를 바꿀 생각도 없었고 바꾸지도 않았다.

  다음 해 난, 이유 없이(?) 보직에서 밀려났다.